[구멍 난 기술특례] 성장한 기술특례 기업, ‘이것’ 달랐다
기술력 덕에 삼성전자·오리온 품에 안기기도
성장성과 기술력이 있지만 지금 당장 이익을 내지 못하는 혁신 기업을 발굴하고자 2005년 도입한 기술특례상장 제도는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도입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기술 특례로 상장한 기업 중 성공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96%의 기업이 상장 당시 제시한 실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4곳 중 3곳은 현재 주가가 공모가를 밑돌고 있다. 기술특례기업의 81%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퇴출을 유예해 줘 ‘좀비기업’만 양산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기술특례상장 제도의 문제를 짚어봤다.
[편집자 주]
원자 현미경 제품 개발 전문업체인 파크시스템스는 2015년 기술특례상장 방식으로 코스닥시장에 등장했다. 상장 첫날 시가총액은 461억원, 순위로 보면 866위에 불과했다. 9년이 지난 지금 파크시스템스의 위상은 달라졌다. 시가총액은 1조1900억원으로 25배 넘게 증가했고, 코스닥시장 순위도 44위까지 올라섰다.
파크시스템스는 상장 이듬해부터 흑자 전환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후로도 실적은 개선세를 이어갔고, 지난해 매출 1448억원, 영업이익 276억원을 기록했다. 상장 후 9년 만에 영업이익이 10배 넘게 늘었다. 기업공개(IPO) 때부터 강조했던 산업용 현미경 투자도 결실을 봤다. 인공지능(AI) 열풍과 함께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공정에 첨단 계측 장비가 필요한데, 파크시스템스는 나노 단위 계측을 위한 원자현미경을 공급 중이다.
기술특례상장을 통해 코스닥시장에 입성한 기업 대다수가 실적과 주가 모두 부진하지만, 성장 스토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곳도 있다. 이들 기업은 상장 때 내세웠던 기술을 공모자금으로 더 고도화하고, 상장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사업 영역을 발굴했다. 투자자에게 사업 정보도 적극적으로 공유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대부분 기술특례기업은 몸값이 가장 비쌀 때를 노려 상장하는데, 진짜로 자금을 조달해 기업을 키우려는 창업가는 돈이 필요할 때 상장한다”면서 “결국 공모자금을 어떻게 썼느냐를 보는 것이 이 기업이 진짜 될지 안될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일부터 이달 2일까지 개최는 '세미콘 코리아'에서 파크시스템스가 공개한 원자현미경 'AFM'의 모습./전병수 기자
1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기술특례상장 기업 199곳(스팩 합병 제외) 가운데 현재 주가가 공모가보다 4배 이상 오른 곳은 파크시스템스를 비롯해 레인보우로보틱스, HLB제약, 알테오젠, 석경에이티, 레고켐바이오 등 6개사다.
우선 IPO로 조달한 자금을 계획대로 집행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석경에이티는 상장하면서 공모자금 총 99억7800만원을 2023년까지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 등에 쓰기로 했는데, 지난해 말로 모두 투자를 마쳤다. HLB제약과 알테오젠도 공모자금 투자 일정을 지켰다.
신사업 발굴도 적극적이었다. 석경에이티는 상장 당시 중장기 사업으로 제시했던 이차전지 전고체·전해질 소재 사업과 관련한 액체 없이 양극재와 전해질 사이를 연결하는 기술을 개발해 사업화 중이다. 알테오젠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정맥주사(IV)를 피하주사(SC)로 바꾸는 기술을 수출하는 성과를 냈고, HLB제약은 2021년부터 헬스케어소재 연구개발 기업 휴메딕스와 비만치료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픽=손민균
또 투자자에게 적극적으로 기업 상황과 계획을 밝혔다. 공모가 대비 주가가 4배 이상 오른 6개 기술특례상장 기업들은 금융감독원 공시 기준 연평균 2.89회씩 IR(기업 설명) 활동을 진행했다. 코스닥시장 상장 규정에 따라 ‘신규 상장일로부터 2년간 연 1회 이상’인 IR 의무보다 더 많이 소화한 셈이다. 파크시스템스가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56차례 IR을 열어 가장 적극적이었고, 알테오젠과 레코켐바이오의 IR 개최 횟수도 각각 연평균 1.82회, 4.44회로 꾸준한 모습을 보였다.
기술력을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우군을 만난 경우도 있다. 레인보우로보틱스와 레고켐바이오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지난해 삼성전자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삼성전자가 2029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콜옵션을 행사, 레인보우로보틱스 지분율을 59.94%까지 확대할 수 있다. 레고켐바이오는 오리온이 올해 1월 지분 25.73%를 5485억원에 사들이며 최대 주주에 올랐다.
성공한 기술특례상장 기업 사례를 더 늘리려면 상장 전 심사를 강화하는 것을 넘어 사후 관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술특례상장 전 기술의 성공 가능성도 평가해야 하지만, 사업성이 중요한 만큼 매출 확대 전략 등이 약속대로 지켜지는지도 지속해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정아 기자 jenn1871@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