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의 공포`, `선`은 지켜주셔야죠[신하연의 여의도 돋보기]
금융투자상품 끄트머리에서 늘 볼 수 있는 문장입니다. 본인이 선택하고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을 글자가 작아서 모르는 건 아닐 겁니다.
최근 국내 금융시장은 'H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HSCEI)의 급락에 따라 이를 기초자산으로 발행했던 주가연계증권(ELS) 상품들이 대거 손실을 보게 될 위험에 처한 건데요. 알리바바, 텐센트, 샤오미 등 홍콩증시에 상장된 중국 종목으로 구성된 홍콩H지수가 경기둔화와 미·중 갈등 등 거듭되는 악재에 부진을 이어가고 있어섭니다.
특히 H지수가 1만~1만2000포인트를 오갔던 2021년 초 발행됐던 ELS들이 문제입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에서 판매한 홍콩H지수 ELS 중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규모만 약 8조원 이상인데 현재 홍콩H지수는 3년 전인 2021년 상반기 당시보다 반토막 난 상태입니다.
만기시 최종 가격이 일정 이하가 되면 원금 손실이 발생하는 ELS 특성상 H지수가 현재 수준에서 20~35% 높은 7000~8000포인트 수준으로 오르지 않으면 상반기 3조원대가 넘는 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전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서울 여의도 금투센터에서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와의 간담회를 진행한 후 ELS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며 백브리핑을 진행했습니다.
이 원장은 "고위험·고난도 상품을 권유하는 것이 설명을 했는지 여부를 떠나 권유 자체가 적절한지에 대해 적법성 원칙상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라며 은행 책임론을 강하게 몰아붙였습니다.
그럼 은행에서는 ELS를 팔지 말아야 하는지, 은행 권유로 매매한 투자자들을 전부 선량한 투자자라고 볼 수 있는지, 2021년 초 은행의 AI 시스템 도입 당시 불완전판매 가능성을 금융당국이 먼저 인지하거나 경고를 한 적은 없는지 묻는 질문에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보겠다는 것"이라며 말을 아꼈고요.
불완전 판매 관련해서 검사 말고도 추가적인 제도 보완이나 제도 변경이 필요하다고 보느냐는 질의에도 "금융위와 협의가 안 된 상태에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다"며 말을 줄였습니다.
창구에서 아예 손실이 없을 것처럼 속이는 등 불완전판매가 있었다면 제대로 조사해서 처벌 받아야 마땅합니다. 다만 선을 명확히 해야 하겠죠. 은행의 책임을 덮어주자는 게 아닙니다.
불완전 판매를 별건으로 놓고 보면 모든 투자자들이 단지 무지하고 무고한 선량한 피해자일까요? 모든 책임은 투자자에게 귀속된다는 건 무책임한 책임 면피용 멘트가 아닙니다. 투자자 책임을 너무 가볍게만 만드는 것은 결국 한국 금융시장 선진화에도 독이 될 겁니다.
20년 넘게 파생상품을 담당한 업계의 한 관계자에게 사견을 묻자 "뭐 저희(금투업계)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가요. 하라면 하는 거죠"하는 답변이 한숨과 함께 되돌아왔습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문재인 전 정부 때도 사모펀드의 원금 전액 보상 논란이 업계에서 뒷말을 낳았습니다. 투자자 본인의 책임 대신 재정으로 위험을 떠안는 그릇된 투자 문화를 정부가 조장할 수 있단 겁니다. 올해 전세 사기금 전액 국가보상,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과 빚투(빚내서 투자)에 따른 청년 빚 탕감 등도 같은 맥락이고요.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판매사 책임만 물을 순 없습니다. 당국이 이번 사태를 엄정히 수사하고 처벌하는 동시에 불법적인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구조적인 문제를 해소하고 개선 방안을 내놓아야 금융시장도, 투자자들도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외의 책임은 투자자의 몫입니다.
신하연 기자(summer@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