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3남매를 둔 가장입니다' 말에 속았다…5년간 6조·2만명 피해[코인사기공화국]
투기거래·SNS강국·제도허점이 만든 사기천국
①-⑵'ICC·RNDX' 코인 사기사건 한 달간의 추적기'
코인사기 피해액 5년 간 6조
피해자 수 5년 간 7배 폭증
다단계 영업 조직과 결합…수법 고도화
"가상자산(코인) 투자 사기를 당해 수많은 사람의 인생이 망가졌다. 이대로라면 코인 사기로 국민경제가 골병들 것이다."
아시아경제 인터뷰에 응한 70대 김성용(가명)씨는 '인터코인캐피털(Inter Coin Capital)' 사기 사건의 피해자다. 2019년 6월 2억8000만원을 투자해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75세 고령인 그가 아직도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한 이유다. 김씨는 '대한민국은 사기 공화국'이라고 명명하며 혀를 찼다. 그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일대에서 시작된 다단계 코인 사기가 국내를 넘어 일본까지 손을 뻗쳐 서민들 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한탄했다.
ICC 사건으로 재판 중인 조모씨가 2019년 9월 제주 새마을금고 연수원에서 투자설명회를 열고 있다. [사진제공=ICC 피해자 단체]
ICC 사건으로 재판 중인 조모씨가 2019년 9월 제주 새마을금고 연수원에서 투자설명회를 열고 있다. [사진제공=ICC 피해자 단체]
해외까지 손 뻗친 코인 사기 조직…피해자들, 자살하고 암 재발
아시아경제 특별취재팀은 김씨의 말이 현실에 입각한 발언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코인 사기 실태를 들여다보기 위해 한 달여에 걸쳐 '인터코인캐피털(Inter Coin Capital)·RNDX 코인' 사기 사건을 추적 조사했다. 20여명의 관련 사건 피해자들을 만났고 사기 가담자, 내부고발자,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들을 인터뷰해 사기 조직의 온·오프라인 영업 방식, 조직 구성, 피해 실태 등을 심층 취재했다.
취재 결과 코인 사기는 전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퍼져 있었다. 사기 수법은 교묘하고 치밀했다. 아시아경제가 파악한 ICC 사기 수법은 이랬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 모집책을 통해 투자를 유도한다→전자지갑에 찍힌 수익률과 배당금을 보여주며 안심시킨다→고수익·고배당을 미끼로 투자금을 더 밀어 넣도록 프로모션을 진행한다→투자설명회와 1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연다→갑자기 사이트와 전자지갑을 닫는다→본사 책임이라고 발뺌한다.
ICC 사건을 담당했었던 신언용 법무법인 케이씨엘 변호사는 "외국에 있는 본부에서 사이트와 전자지갑을 닫았다고 기다리라고 피해자들을 달랜 뒤 5년이 지나도록 투자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서 "나중에 고소가 진행되자 자기들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전국에 판매 지점을 두고 뭔가를 팔았다는 점에서 영업 조직은 다단계 방식을 차용했다. 사기 조직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영업소를 만들고 모집책들을 파견했다. 투자자 유치는 온·오프라인에서 동시에 이뤄졌다. 특히 누구나 만들 수 있고 가입할 수 있는 네이버 밴드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공격적으로 활용했다. 수백억원 규모의 피해를 낸 '에프브이피 트레이드(FVP)' 피해자 단체는 "FVP는 투자자 유치를 위해 네이버밴드만 57개를 만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투자자들을 유인했다"고 했다.
오태석 경찰청 경제범죄수사과 경위는 "코인 투자 열풍이 일었던 2020년부터 코인 투자 관련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과거엔 오프라인을 통한 설명회와 피해자 대면을 통한 사기 행태가 많았다면 최근엔 네이버 밴드, 카카오톡과 같은 SNS 등 온라인 수단을 활용한 사기가 늘었고 이로 인해 수도권뿐 아니라 전국에 사기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아시아경제가 15일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으로부터 받은 '최근 5년간 가상자산 불법행위 피해 규모'에 따르면 2019년부터 작년까지 최근 5년간 가상자산 불법행위에 따른 피해액은 6조1663억원, 피해자 수는 1만8236명으로 조사됐다. 연도별 피해액은 2021년 3조1282억원으로 가장 컸는데 자산시장 호황기이자 약 2조4000억원 규모의 피해를 낸 브이글로벌 사건이 터진 해가 이때다. 피해자 수 역시 브이글로벌 사건이 있었던 2021년을 제외하곤 매년 느는 추세다. 2019년 597명이었던 코인 사기 피해자 수는 지난해 4377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은밀한 영업이 가능한 비대면 방식도 존재한다. L투자그룹이 주도한 'RNDX 코인' 사기 사건이 대표적이다. 여기에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대 초중반 영업사원들이 '3남매를 둔 한 가정의 아버지'로 얼굴을 바꿔 깡통 코인을 팔았다. 본부는 어린 사원들에게 대포폰·가명·영업 대본을 줬다. 영화 '타짜'를 보여주면서는 "피해자들은 어차피 우리 아니어도 다른 데 가서 돈 잃을 사람들이다, 우리가 적게 가져가는 게 그들에게도 나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이처럼 사기 조직이 전국적으로 세를 불려 사기 행각을 벌이는 동안 피해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돈을 날렸고, 친구와 가족은 등을 돌렸다. 지인 돈까지 끌어다 투자한 피해자는 죄책감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암이 재발했다. ICC 피해자 5명은 스스로 삶을 등졌다. 원금이라도 건지기 위해 피해자들은 ICC 한국 총책인 조모씨를 고소하고, 법원과 경찰청에 탄원서를 보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가족이 알까 봐 혹은 자포자기한 심신 상태의 피해자들이 많아 고소에 참여한 피해자 수는 전체 피해자 중 1%도 안 돼요." ICC 피해자 대표를 맡고있는 오영식(가명)씨는 상황을 전하며 안타까워했다.
피해자들이 제풀에 지쳐 포기하도록 조씨는 변호사를 여러 번 바꿔가며 재판을 지연시켰다. 2022년 오씨 등 306명이 조씨 등 23명을 고소한 사건은 아직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피해자가 가해자로…사기 입증하기 쉽지 않아
다단계 코인 사기는 민·형사상 죄를 묻기가 어렵다. 다단계 특성상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모호해, 무 자르듯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피해자가 지인이나 친인척을 소개해 의도치 않게 가해자 위치에 서게 되기도 한다. 피해자였다가 사기 조직의 회유에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법적 구제 절차를 밟기엔 금전적 부담과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 때문에 가해자와 합의를 보거나 원금의 일부라도 돌려받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거나 단죄가 어렵게 돼 코인 사기가 뿌리뽑히지 않고 있다.
아시아경제가 2021년부터 최근까지 약 3년 6개월 간 나온 코인·다단계 관련 1·2심 확정 판결문 162건을 분석한 결과는 이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조사 결과 전체 피고인 297명 중 실형을 선고받은 이는 88명(39%)이었다. 절반 이상이 풀려났거나 집행유예에 그친 셈이다.
다단계 특성상 여러 명이 사기 작전(?)에 가담한다는 점도 코인 사기 범죄가 되풀이되는 이유다. 설사 경찰이 몸통을 잡아넣더라도 하부조직에 속한 이들이 비슷한 수법으로 또 다른 사기 범죄를 저지른다. 공모자들이 사기 수법을 학습한 뒤 주범이 돼 사기 피해를 재양산하는 셈이다. 일례로 ICC 관련 고소장에 피고소인으로 이름이 적힌 이들이 불구속 수사를 받는 동안에도 FVP, UEZ, OPIX 등의 가상 법인을 세우고 유사한 수법으로 사기 범죄를 반복적으로 저질렀다.
인터넷 강국 한국, 코인 사기에 유리…처벌 가벼워 재범 가능성 높아
가상자산의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의 복잡성도 수사 문턱을 높이는 요인이다. 2020년대 초반 피해자 신고 후에도 수사당국의 '불송치' 결정이 많았던 것 역시 이 같은 연유에서다. 2020년부터 주식·가상자산 사기 피해를 1000건 이상 도왔던 '피해 구제 도우미' 대표는 "지금은 검찰 기소가 된 사건도 불송치 결정을 20번 가까이 받았다"며 "모두에게 정말 힘든 과정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에서 코인 사기가 성행하는 배경에는 국내 가상자산 시장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국내 가상자산 이용자 숫자는 작년 하반기 기준 645만명에 달한다. 주식 투자자(1400만명)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코인을 거래하는 셈이다. 즉 투기성이 강한 코인 거래에 대해 심리적 장벽이 낮다는 의미다.
또 국내 SNS 환경도 코인 사기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휴대폰(모바일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미국, 중국, 영국보다 많다. 게다가 주로 이용하는 SNS도 소통에 특화되었다. 온라인을 통해 투자 사기에 노출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투자'라는 명목으로 접근해 다단계 방식으로 영업하는 코인 사기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유다.
제도의 문제도 존재한다. 코인 사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유사수신법과 일반 사기 혐의가 적용된다. 유사수신법은 형량이 최대 5년에 불과하고, 원금 보장 대신 높은 수익률을 약속할 경우 사기죄만 적용된다. 사기죄는 기망당한 사실을 피해자들이 입증해야 한다. 법리적으로 다투는 과정에서 '코인 사기꾼'이 무죄를 받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제보받습니다>
'가상자산 투자사기'에 대해 심층 취재 보도할 예정입니다. 코인 범죄 근절을 위한 종합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제보(lsa@asiae.co.kr)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특별취재팀> ▲팀장 이선애 부장 △김민영 차민영 김대현 황윤주 기자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차민영 기자 blooming@asiae.co.kr
황윤주 기자 hyj@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