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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난민으로 북적, 소매점은 자물쇠 채워…이민자가 점령한 뉴욕[르포

맨해튼 랜드마크였던 루즈벨트 호텔,
코로나 폐업 이후 난민 보호소 역할
최근 1년 9개월새 뉴욕에 16만명 유입
난민·노숙자들 넘쳐나 곳곳 슬럼화
뉴욕 시민들, 유화적 이민정책 불만 확대
11월 대선서 최대 쟁점 부상

18일(현지시간) 오후 뉴욕 맨해튼 노숙자 쉼터에서 무료 급식을 기다리는 노숙자들(왼쪽)과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자(오른쪽). 뉴욕=권해영 특파원


지난 24일 오전 11시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 근처.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로 보이는 남성들은 관광객들에게 연신 헤드셋을 팔고 있었다. 최근 몇 년 새 뉴욕에 들어 온 이주자들이 급증하면서 관광객을 상대로 호객 행위에 나서는 이민자들이 맨해튼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 18일 방문한 뉴욕 맨해튼 이스트 45번가와 밴더빌트 애비뉴에 위치한 루즈벨트 호텔에는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가 두 손에 한가득 짐을 든 채 어린 아이 두 명과 함께 호텔 입구를 서성였다. 맨해튼 빌딩숲 사이로 부는 칼바람 속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그들은 한눈에 봐도 중남미 출신의 이주자였다.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남성은 "엘살바도르"라고 했다. 잠시 대기하던 그는 이후 호텔 앞을 지키는 직원들에게 "이민자! 이민자!(migrant! migrant!)"라는 말을 반복하더니 가족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924년 문을 열어 한때 맨해튼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루즈벨트 호텔은 이제 미 대선 최대 이슈인 불법 이민 문제를 응축한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난민 유입으로 몸살을 앓는 뉴욕의 모습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호텔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직격탄을 맞고 폐업했다. 이후 뉴욕의 대표적인 난민 보호소로 탈바꿈했지만 밀려드는 이주자들을 감당하지 못해 포화 상태다. 호텔 객실 창문은 마치 난민으로 가득 찬 보호소 상황을 감추려는 듯 모두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같은 건물 코너에 있는 주점 '밴더 바'도 난민 보호소 사무실로 바뀌었다. 주점 창문 너머로는 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주점 밖을 서성이자 군인 한 명이 나와 "이곳은 이민자들을 위한 서류 작업을 하는 곳"이라며 "이민자들이 밀려와 휴일에도 문을 연다"고 했다. 호텔 내부를 촬영할 수 있느냐고 묻자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요일 루즈벨트 호텔을 찾은 건 기자뿐만이 아니었다. 기자 옆을 지나던 외국인 남녀 두 명은 "우리도 독일 기자"라며 "미 대선 최대 이슈인 불법 이민 문제를 취재하러 왔다"고 했다.


이주자들이 뉴욕 맨해튼 루즈벨트 호텔 외부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출처=뉴욕 데일리 뉴스


'이민자의 천국' 뉴욕이 '난민 지옥'으로 변하고 있다. 뉴욕시는 1981년 법원 판결에 따라 미국에서 유일하게 난민들에게 무료 쉼터를 제공한다. 이에 중남미, 아프리카를 떠나 미 남부 국경을 넘은 이주자들이 뉴욕으로 몰려오고 있다. 뉴욕에는 2022년 봄부터 2023년 말까지 약 1년 반 남짓 기간 시 인구(810만명)의 2%에 달하는 15만6000명 이상의 이주자가 유입됐다. 이 중 6만명이 200개 이상의 난민 보호소에 체류하고 있다. 망명 신청이 급증하고, 보호소 수용 여력이 한계에 이르자 뉴욕시는 지난해 10월부터 강제 퇴거 조치를 시행 중이다. 독신 성인은 30일, 자녀를 둔 성인은 60일 이상이 지나면 보호소에서 나가야 한다. 에릭 아담스 뉴욕시장은 "난민 문제가 뉴욕시를 파괴할 것"이라며 비상사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뉴욕시에 따르면 2025년까지 난민 수는 두 배 증가하고, 향후 3년간 난민 수용 비용은 120억달러(약 16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뉴욕시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 난민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엔 난민들에게 숙식 지원도 모자라 현금처럼 쓸 수 있는 선불카드까지 지급했다. 무료 급식 식단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불평이 나오자 난민들이 직접 식자재를 구입할 수 있도록 현금성 지원에 나선 것이다. 뉴욕시는 버려지는 음식물을 줄이기 위한 대책이라고 설명했지만, 납세자들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현재 뉴욕시는 닥고라는 업체를 통해 난민들에게 한 끼 11달러(약 1만4700원)의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데, 버려지는 급식으로만 하루에 3만9000달러(약 5200만원)가 허공으로 사라진다.

최근엔 넘쳐나는 난민과 노숙자들로 도시 곳곳이 슬럼화하고 이민자 범죄 위험이 증가해 시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뉴욕에 사는 한인 정모씨는 "불법 이민자들을 먹이고 재우는 데 내 세금을 쓰는 것도 모자라 치안까지 불안해지니 화가 난다"며 "뉴욕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생계형 범죄 또한 늘어나면서 미국 약국 겸 편의점 체인인 CVS를 비롯한 소매점들은 맨해튼 매장 상품 진열대를 자물쇠로 걸어 잠그고 있다.


18일(현지시간) 오전 뉴욕 맨해튼 이스트 45번가와 밴더빌트 애비뉴에 위치한 루즈벨트 호텔 난민 보호소로 중남미 출신 이주자들이 들어가고 있다. 뉴욕=권해영 특파원


난민 유입으로 마비된 뉴욕의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플로리다, 텍사스 등 불법 이민에 강경한 공화당 소속 주지사가 있는 지역들은 난민들을 버스에 태워 뉴욕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유화적인 이민 정책을 펴 온 민주당 우세 지역이 난민을 책임지라는 취지다.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을 중시해 온 뉴욕은 지금 난민 문제로 인한 사회·정치적 갈등이 응축돼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다.

민주당 텃밭인 뉴욕도 서서히 '우클릭'하고 있다. 최근 뉴욕주 롱아일랜드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인물은 민주당의 톰 스워지 후보다. 그는 소속 정당은 민주당이지만 불법 이민 문제와 관련해서는 공화당과 견해를 같이하는 중도 실용주의자다. 스워지 의원은 공화당과 논의해 불법 이민 통제를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민주당을 지지하면서도 이민 문제에 강경해진 뉴욕 시민의 정치 성향 변화를 반영한 선거 결과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난민 문제는 미국인들에게 11월 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불법 이민 봉쇄를 위해 재임 시절 남부 국경장벽 건설을 추진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집권 시 불법 이민자 즉각 추방을 공약했다. 여론이 악화하자 조 바이든 행정부도 입장을 전면 수정했다. 기존의 유화적인 이민 정책 기조를 버리고 지난달 의회에 대통령의 국경 봉쇄 권한 강화를 요청하고 나섰다. 미 대선 결과를 좌우할 '스윙 스테이트(경합주)'에서 불법 이민 문제는 더욱 민감한 현안이 되고 있다. 지난달 말 블룸버그 조사에 따르면 경합주 유권자 중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이민 문제를 꼽은 응답은 13%로 직전 조사(10%) 대비 3%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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