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아 출신 애널리스트가 본 현대차그룹… “중고차 가격 방어력 높아져 ‘뛰어난 2등’ 올라섰다”
애널리스트에서 기아로 이직했다가, 다시 애널리스트로
복귀 첫 보고서 “현대차그룹 브랜드 경쟁력 커졌다” 평가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현대차그룹 제공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현대차그룹 제공
지난 7월 한 증권사가 발간한 현대차그룹 분석 보고서가 기관투자자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자동차 브랜드는 전통적으로 사치재인 명품 브랜드와 비슷해 소비자의 충성도와 선호도가 잘 바뀌지 않는데, 현대차와 기아는 저가 브랜드라는 과거 인식을 뒤집고 글로벌 티어-2(2등급군)까지 올라갔다는 게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김창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이다. 김 연구위원은 증권사 애널리스트로 일하다 2015년 기아로 자리를 옮겨 9년간 IR(기업 설명) 업무를 맡았다. 올해 4월 한국투자증권으로 이직해 애널리스트로 복귀했다.
현대차그룹의 내부를 경험한 그가 애널리스트 컴백 후 처음 써낸 보고서였던 만큼 투자업계에서 관심이 컸다. 그의 설명을 듣고자 자산운용사 등 100여곳이 세미나를 잡았다고 한다.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지난 14일에도 김 연구위원은 한 자산운용사에서 보고서 내용을 설명하는 일정을 마친 뒤였다.
김창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이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말하고 있다. /권오은 기자
김창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이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말하고 있다. /권오은 기자
현대차와 기아 주가는 올해 들어 지난 6월 연고점까지 가파른 오름세를 보였다. 현대차 주가는 지난해 말 20만3500원에서 올해 6월 27일 29만8000원(종가)까지 46% 뛰며 사상 최고가를 새로 썼다. 같은 기간 기아 주가도 10만원에서 6월 13만2300원까지 32% 상승했다. 하지만 현재 주가는 두 회사 모두 고점 대비 15%, 20%가량 빠진 상태다. 투자자 입장에선 다시 연고점을 뚫고 올라갈 여력이 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김 연구위원은 현대차와 기아가 글로벌 티어-2 그룹에서도 선두주자라고 단언했다. 잔존가치가 높아져 소비자 사이에 중고로 차를 팔 때 가격이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방어된다는 믿음이 생긴 덕분이다. 전 세계 티어-2에 속하는 자동차 브랜드의 평균 주가수익비율(PER·시가총액 ÷ 순이익)은 6.3배 정도다. 현대차와 기아의 PER이 4.5배 수준임을 고려하면 현대차와 기아 주가가 최소 20% 더 오를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김 연구위원은 기아를 떠나 밖에서 회사를 보니 긍정적인 면이 더 많이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차그룹에서 일할 때는 당장의 업무에 밀려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며 “오히려 밖에서 수치들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브랜드 가치를 비롯해 긍정적인 면에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이하 일문일답.
―현대차와 기아의 브랜드 파워가 높아졌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잔존가치, 인센티브(자동차 제조사가 딜러사에 지급하는 보조금), 평균 차령(차량 연령)을 분석해 현대차그룹의 브랜드 포지셔닝을 티어-2로 분류했다. 그중에서도 브랜드 경쟁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은 잔존가치다.
잔존가치는 자동차를 나중에 되팔 때 얼마만큼의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는지를 수치화한 것이다. 리스 비중이 큰 북미 소비자는 잔존가치에 더 민감하다. 예를 들어 36개월 탄 기아 자동차를 2018년 중고차로 내놨을 때 잔존가치는 구입가의 39.7%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기준으로는 53.6%였다. 전 세계 브랜드 중 4위에 해당한다.
잔존가치가 높게 형성되면 소비자가 신차 초기 비용이 상대적으로 많이 들어도 몇 년 뒤 더 이득이 될 것을 안다. 쉽게 말해 현대차와 기아가 보조금을 덜 줘도 소비자가 구매할 유인이 생긴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평균 판매단가(ASP)가 올라가 수익성이 개선되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센티브와 시장 점유율만 놓고 보면 현대차와 기아의 브랜드 가치가 티어-3에서 티어-2로 올라간 데 이어 티어-1까지 이동 중이라고 분석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티어-3는 인센티브를 높여도 시장 점유율이 더 커지지 않는 브랜드다. 닛산이 대표적이다. 티어-2는 인센티브에 따라 시장 점유율이 움직이는 혼다나 제널럴모터스(GM) 등이 해당한다. 티어-1은 인센티브를 적게 줘도 시장 점유율이 견고하게 유지되는 브랜드다. 도요타가 티어-1에 해당한다. 도요타는 인센티브를 적게 쓰고도 지난 20년간 미국 시장 점유율 15% 안팎을 지켜왔다.
현대차와 기아는 2010년대 중반 티어-3까지 밀렸다가, 상품성 개선과 원가 개선 등을 토대로 브랜드 지위가 차츰 올라갔다. 지금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센티브를 쓰고도 점유율이 견조하다. 미국 시장에서 지난 10년간 시장 점유율을 3%포인트 이상 끌어올린 브랜드는 테슬라와 현대차그룹뿐이다.”
―현대차와 기아의 브랜드 가치가 올라갔다고 하지만, PER 등 지표는 다른 자동차 브랜드에 뒤진다.
“현대차와 기아는 내연기관차부터 하이브리드차, 전기차까지 제조할 수 있는 기업이다. 생산 유연성이 크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1등은 아니다. 미국 시장에서 전기차는 테슬라가 압도적이고, 하이브리드차 시장은 도요타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현대차와 기아는 뛰어난 2등인데, 자본시장에서 1등과 2등 사이엔 큰 격차가 있다.”
그래픽=정서희
그래픽=정서희
―현대차·기아 주가 모두 올해 상반기 강세였으나, 이후 후퇴해 제자리걸음 중이다. 다시 주가가 오름세를 타기 위한 조건은 뭐라 보는가.
“브랜드 경쟁력이 올라왔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표본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센티브를 적게 주고도 점유율을 지킨 것이 최근 2년 정도인데, 비슷한 사례를 더 쌓아야 한다. 특히 자동차 업황이 꺾이고 있다. 포드와 GM의 올해 2분기 실적이 보여줬다. 현대차와 기아가 이런 업황에도 꾸준히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짧게는 3분기 실적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가 관건이다.”
―실적을 뒷받침하던 원화 약세가 강세(미국 달러 대비 원화 환율 하락)하면 수익성에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환율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원화 강세 시기에도 수익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현대차와 기아의 성과를 환율에서만 찾을 일은 아니다. 일본 엔화 환율 상황도 좋지만 혼다와 닛산의 영업이익률이 현대차그룹에 못 미친다. 기아 EV9이 ‘2024 세계 올해의 차’로 선정된 것처럼 제품 자체 측면에서도 경쟁사보다 우수한 지표가 많다.”
―업황 외에 현대차그룹의 또 다른 위험요인을 꼽는다면.
“소프트웨어 중심의 차량(SDV)과 관련해 아직 구체적인 전략이 나오지 않아 자본시장에서는 이부분을 위협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SDV가 얼마나 진척됐는지, 어떤 계획을 갖고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그룹 차원에서 설명이 필요하다. 또 아직 보스턴 다이내믹스(로봇 기업) 등 신규로 투자한 사업에서 성과가 나오지 않아 계속 투자금만 까먹는 부실 사업부가 되지 않을지가 걱정이다.”
정비사가 현대차 '아이오닉 5' 차량을 정비하는 모습. /현대차·기아
정비사가 현대차 '아이오닉 5' 차량을 정비하는 모습. /현대차·기아
―현대차보다 기아를 ‘탑 픽(Top-Pick·최선호주)’으로 제시했다. 잔존가치 측면에서 현대차가 기아에 밀리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현대차가 잔존가치를 공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아에 못 미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룹명 자체가 현대차그룹인 만큼 현대차가 잘 돼야 하는데, 최근 인센티브를 더 많이 쓰고도 시장 점유율이 제자리인 상황이다. 기아보다 현대차가 조직 규모가 큰 점 등을 고려할 때 북미 시장에서 더 많은 매출과 이익을 내야 할 것으로 본다. 현대차가 고객 수요에 맞는 자동차를 적정한 가격으로 출시하고, 잔존가치도 높이고 있는지, 적절한 인센티브를 사용하고 있는지 등을 내부적으로 고민해 봐야 한다.”
―애널리스트 복귀 후 첫 보고서로 전 직장을 다뤘는데, 부담은 없었나.
“부담은 없었다. 오히려 떠나고 밖에서 숫자로 비교·검증해 보니 현대차와 기아가 일군 수익성이 더 대단해 보였다. 앞으로도 적극적이면서 다른 시각으로 자동차 산업을 보고 싶다. 자동차 업종의 다른 애널리스트들이 그간 좋은 보고서로 회사와 외부 이해 관계자의 정보 격차를 줄여왔는데, 나 역시 그런 중간 역할을 잘 수행하고 싶다.”
권오은 기자 oheun@chosunbiz.com